The Annals of Ishitalya

이슈타리아 전기

별은 부서져 대지가 되었고, 그 위에 남은 이름들은 끝내 전설이 되었다.

봉인된 성좌를 깨우는 중...
ISHVALT · YEAR 960

이슈타리아 전기
— 이슈발트의 기록 —

별의 잔해 위에 길이 놓이고, 오래된 맹세는 숲과 왕관과 항구의 이름이 되었다. 북녘의 설원에서 남해의 파도까지, 무너진 낙원의 후예들은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보다 저마다 새로운 시대의 첫 문장을 새긴다.

“무너진 낙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파편마다 새로운 별이 피어났다.”

Ishvalt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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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의 파편 위에 선 대륙

    한때 낙원이었던 땅은 산산이 흩어졌고, 가장 거대한 파편 위에 수많은 나라와 종족의 계절이 쌓였다.
    이슈발트력 960년. 오래된 별빛은 여전히 대륙의 밤을 비춘다.

    낙원의 파편

    이슈타리아가 무너진 날, 가장 거대한 조각 하나가 별의 바다를 건너 새로운 대지가 되었다.

    별의 후예

    살아남기 위해 맺은 서로 다른 맹세는 피와 세월을 지나 오늘의 여러 종족으로 뿌리내렸다.

    끝나지 않은 연대기

    왕관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잔은 채워지고, 길드의 문은 열리며, 이름 없는 하루가 조용히 역사가 된다.

    이슈발트를 흐르는 세 갈래의 노래

    태초의 노래

    륀데의 이름과 무너진 별의 자손의 전승은 기도와 자장가, 오래된 비문 속에 남았다. 어느 구절이 진실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왕관의 노래

    황금 들판과 얼어붙은 왕좌, 돛이 가득한 바다와 고대의 숲. 네 권역의 맹세와 욕망이 대륙의 균형을 붙들고 있다.

    길 위의 노래

    태초의 화산은 아직 잠들지 않았고, 검은 숲은 이름 없는 그림자를 품는다. 길이 끝나는 곳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기다린다.

    봉인된 연대기

    낙원의 마지막 빛에서 왕국의 첫 새벽까지. 잊힌 이름과 불탄 왕관이 남긴 흔적을 따라간다.

    I · 노래가 역사가 되기 전

    태초의 땅, 이슈타리아

    태초의 낙원 이슈타리아
    “그때에는 별이 하늘에만 있지 않았고, 모든 생명의 가슴속에도 하나씩 머물렀다.”

    머나먼 별의 과거, 아직 시간에 해와 달의 이름조차 붙지 않았던 시대에 이슈타리아라 불리는 낙원의 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떤 성전은 그곳을 세계의 첫 대륙이라 기록하고, 오래된 숲의 노래는 모든 대륙이 갈라져 나오기 전의 하나뿐인 땅이라 부른다. 또 북부의 구전에서는 이슈타리아가 대지가 아니라 밤하늘을 떠돌던 거대한 별이었다고도 한다. 어느 이야기가 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전승은 한 가지에서만큼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 그곳은 지금의 세계가 잃어버린 완전함을 품고 있었다.

    만물의 어머니 륀데는 자신의 살로 산맥을 세우고, 피로 강을 흐르게 하며, 숨결로 바람과 구름을 낳았다고 한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어진 자리에서는 숲이 자랐고, 눈물이 고인 곳에서는 처음으로 바다가 빛났다. 밤이 찾아오면 륀데는 손가락 끝으로 하늘에 불씨를 박아 넣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별의 기원이라는 전승도 있다.

    그 시대의 생명들은 굶주림과 겨울을 알았으나,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지는 필요한 만큼 열매를 내어 주었고, 강은 길을 잃은 자를 고향으로 이끌었다. 사람과 짐승, 정령과 이름 없는 빛의 존재들은 서로 다른 말을 쓰면서도 마음의 뜻을 알아들었다. 죽음조차 완전한 끝이 아니라, 륀데의 품으로 돌아가 다시 별빛이 되는 긴 귀향으로 여겨졌다.

    이슈타리아의 백성은 스스로를 륀데의 아이이자 별의 자손이라 불렀다. 그들은 가슴속에 어머니가 나누어 준 작은 빛이 있으며, 그 빛이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이어 준다고 믿었다. 왕과 종, 인간과 이형의 구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어느 누구도 다른 생명을 세계 밖의 존재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낙원은 영원하리라 여겨졌다. 어머니가 잠들어도 산맥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별의 자손이 노래하는 한 밤은 결코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훗날의 사제들은 바로 그 확신이 최초의 오만이었다고 적었고, 엘프의 현자들은 사랑받는 세계가 스스로를 불멸이라 착각한 순간부터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노래한다.

    II · 별 바깥에서 온 밤

    무너진 별의 자손

    어비스에 침식되어 무너지는 이슈타리아
    “심연은 성문을 부수지 않았다. 먼저 사람들의 꿈속에 문 하나를 만들었다.”

    낙원의 몰락은 거대한 전쟁이나 하늘을 가르는 번개로 시작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름 붙이지 못한 작은 어긋남뿐이었다. 봄에 피어야 할 꽃이 한밤중에 검게 시들고, 바다로 흐르던 강이 사흘 동안 산을 향해 거꾸로 흘렀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이들이 나타났고, 별빛이 닿지 않는 우물 밑에서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발견되었다.

    그 어긋남의 근원을 후세는 어비스라 불렀다. 어비스는 단순한 어둠도, 하나의 악한 신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를 부정하는 틈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본래의 이름에서 밀어내는 심연이었다. 불은 차갑게 타고, 치유의 물은 살을 썩게 했으며, 사랑은 집착으로, 믿음은 광기로 뒤틀렸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심연이 바깥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마음과 오래된 원한 속에서도 길을 찾는다는 사실이었다.

    륀데가 그 재앙에 맞서 싸웠다는 노래가 있다. 그녀가 산맥을 방패로 들고 일곱 밤 동안 별 바깥의 어둠을 막았다는 노래, 자신의 심장을 갈라 아이들에게 마지막 빛을 나누어 주었다는 노래, 혹은 이미 오래전에 침묵했으며 별의 자손이 어머니의 부재를 감추기 위해 영웅담을 지어 냈다는 금지된 기록도 남아 있다. 진실은 멸망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

    마침내 하늘에 금이 갔다. 처음에는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흰 선이었으나, 그것은 대륙 끝에서 끝까지 뻗어 수천 갈래로 갈라졌다. 별들은 궤도를 잃고 추락했으며, 바다는 허공으로 솟구쳤다. 산과 도시, 숲과 생명은 하나의 거대한 비명 속에서 조각났다. 영광의 땅 이슈타리아는 수많은 파편으로 파쇄되어 어둠 속으로 흩어졌고, 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 살아남은 조각이 훗날 이슈발트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이 그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무너지는 성벽 아래에서 서로의 손을 붙잡은 자들, 륀데의 마지막 불씨를 품었다고 전해지는 자들, 혹은 단지 죽음이 자신을 비껴간 이유조차 알지 못한 자들이 폐허 위에 눈을 떴다. 그들은 더 이상 낙원의 백성이 아니었다. 하늘도, 고향도, 어머니의 목소리도 잃은 채 살아남았다는 이유 하나로 후세의 노래 속에서 무너진 별의 자손이라 불리게 되었다.

    III · 이름 없는 긴 전쟁

    혼돈의 정화

    혼돈에 잠긴 이슈발트에서 싸우는 생존자들
    “새로운 땅은 그들을 맞아 주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이 피와 맹세로 그곳을 고향으로 만들었다.”

    이슈발트의 첫 모습은 오늘날의 비옥한 들판이나 푸른 숲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편이 된 세계의 법칙은 서로 맞물리지 못한 채 충돌했고, 낮과 밤의 길이는 날마다 달라졌다. 어떤 골짜기에서는 한 걸음 사이에 수십 년이 흐르고, 어떤 호수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짐승의 울음이 비쳤다고 한다. 흙은 씨앗을 삼킨 채 돌려주지 않았고, 비는 생명을 적시는 대신 기억을 지워 버렸다.

    어비스의 잔재는 대지 깊은 곳과 생명의 몸속에 뿌리를 내렸다. 짐승은 본래의 형상을 잃고 마물이 되었으며, 나무는 지나가는 자의 이름을 훔쳐 뿌리 아래에 묻었다. 죽은 도시의 잔해에서는 주인을 잃은 마법이 밤마다 되살아났고, 한때 사람을 지키던 수호자들은 명령의 의미를 잊은 채 살아 있는 것들을 공격했다.

    무너진 별의 자손은 그런 땅에서 다시 불을 피웠다. 그들은 낙원에서 가져온 마지막 씨앗을 나누어 심고, 서로 다른 언어로 변해 가는 이들의 말을 기록했으며, 혼돈이 짙은 지역마다 돌기둥과 봉인을 세웠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음 사람이 그 이름을 이어받았고, 한 세대가 끝내지 못한 정화는 자식과 제자에게 전해졌다. 이 싸움이 몇 해 동안 이어졌는지 기록은 서로 다르다. 백 년이라는 노래도 있고, 천 년 동안 아침이 오지 않았다는 전승도 있다.

    그들은 어비스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심연은 바다 밑과 검은 숲, 태초의 화산 아래 깊숙한 곳으로 밀려났을 뿐이었다. 대신 생명이 뿌리내릴 작은 영역을 하나씩 넓혀 갔다. 정화된 샘가에는 마을이 생겼고, 봉인탑 주위에는 길과 시장이 놓였다. 오늘날 대륙을 가로지르는 가장 오래된 도로 중 일부는 그 시대에 정화자들이 서로의 불빛을 잇기 위해 만든 순례로였다고 전해진다.

    그 긴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기보다,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겨우 되찾는 것으로 멈추었다. 별의 자손은 낙원을 복원하지 못했으나, 폐허 위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노인이 평온히 눈을 감을 수 있는 땅을 만들었다. 그 순간부터 이슈발트는 단순한 파편이 아니라 새로운 고향이 되었다. 다만 대지 곳곳에 남은 균열은 지금도 때때로 숨을 쉬며, 오래된 봉인이 약해질 때마다 사람들에게 묻는다. 정화는 정말 끝난 적이 있었느냐고.

    IV · 다섯 갈래의 생존

    선조들

    서로 다른 힘을 받아들여 다섯 종족의 선조가 되는 별의 자손들
    “그들은 서로 다른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멸망을 견뎌 냈다.”

    혼돈의 시대가 길어질수록 별의 자손은 예전의 모습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낙원에서는 하나였던 생명의 길이 새 대륙의 혹독한 환경 앞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그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기적이 아니었다. 맹약과 희생, 수백 세대에 걸친 적응이 피와 뼈에 새겨진 끝에 오늘날의 종족들이 모습을 갖추었다.

    서쪽의 깊은 숲으로 들어간 이들은 바람과 강, 고목에 깃든 정령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그 흐름의 일부가 되겠다고 맹세했으며, 그 대가로 긴 생과 예민한 감각을 얻었다. 계절의 기억을 몸에 새긴 그들이 엘프의 선조가 되었다.

    무너지는 산맥과 불타는 지하로 피신한 이들은 대지의 힘을 살과 뼈에 받아들였다. 그들의 몸은 작아졌으나 바위처럼 치밀하고 무거워졌고, 불과 먼지 속에서도 오래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손에 쥔 것을 끝까지 완성하려는 마음을 물려받은 이들이 드워프의 선조가 되었다.

    마나의 폭풍이 끊이지 않던 지역에서는 생명과 마력을 작은 육신 안에 응축한 이들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세상의 미세한 떨림을 듣는 대신 혼돈의 소음에도 쉽게 상처 입게 되었다. 닫힌 장치와 풀리지 않는 주문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호기심을 품은 이들이 하플링의 선조가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누구도 견딜 수 없던 어비스의 잔재를 자신의 몸에 가두었다. 심연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살아 있는 감옥이 되기를 택한 것이다. 그 희생은 뿔과 낯선 피부빛, 강한 저항력으로 후대에 남았고, 그들이 마족의 선조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희생의 노래는 배신의 전설로 뒤틀렸고, 가장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은 오히려 가장 오래 의심받게 되었다.

    어느 한 힘에도 자신을 완전히 맡기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정령의 장수도, 대지의 강인함도, 응축된 마나도 얻지 못했지만 어떤 환경과 사상에도 적응할 여지를 남겼다. 짧은 생을 기록과 제도, 다음 세대의 배움으로 이어 가는 이들이 인간의 선조가 되었다.

    다섯 종족은 서로 다른 기원에서 태어난 타인이 아니었다. 모두 같은 낙원을 잃고 같은 폐허를 걸었던 형제들이었다. 오래된 장례문에는 지금도 “귀와 뿔과 키가 달라도 가슴속 별은 하나”라는 구절이 남아 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한 차이가 시간이 지나며 혈통의 우월함과 증오를 정당화하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이슈발트의 역사는 그 잊힌 형제애를 되찾으려는 이들과 완전히 부정하려는 이들의 싸움이 되었다.

    V · 왕관과 첫 번째 연도

    태초의 왕

    다섯 종족을 통일한 태초의 왕 이슈발트
    “그는 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주었으나, 정작 자신의 진짜 이름은 남기지 않았다.”

    정화의 전쟁이 전설이 되고, 별의 자손이 서로를 다른 종족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뒤에도 이슈발트는 오랫동안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숲의 맹약과 산의 씨족, 강가의 도시와 유랑 부족은 저마다 다른 법과 달력을 사용했다. 오래된 봉인을 두고 분쟁이 벌어졌고, 정화자들이 남긴 유산은 보호해야 할 성물이자 빼앗아야 할 힘이 되었다.

    그 무렵 남쪽의 오래된 길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군대도 왕관도 없이 다섯 종족의 언어로 같은 인사를 건넸으며, 자신을 이슈타리아의 마지막 왕자라고 소개했다. 그의 진짜 이름을 묻는 자들에게는 오직 “나는 이 땅이 잊어버린 이름을 되찾으러 왔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후세는 그가 스스로 택한 이름을 따라 그를 이슈발트, 곧 태초의 왕이라 불렀다.

    그가 정말 멸망한 낙원의 혈통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기록은 그가 륀데의 불씨를 품은 불멸자였다고 주장하고, 어떤 기록은 뛰어난 인간 정복자가 신화를 정치에 이용했을 뿐이라고 비난한다. 엘프의 일부 가문은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선조의 증언을 보관하고 있으며, 드워프의 석판에는 그가 맨손으로 봉인석의 균열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반면 북부의 금서에는 왕의 그림자에서 어비스의 냄새가 났다는 문장도 남아 있다.

    태초의 왕은 오랜 정복과 협상 끝에 대륙의 주요 세력을 하나의 깃발 아래 모았다. 그는 모든 종족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무너진 별의 자손으로 선포하고, 종족과 신앙이 달라도 왕의 길과 시장, 재판소에서는 같은 법의 보호를 받게 했다. 봉인과 도로를 관리할 공동의 조직을 세웠으며, 서로 다른 달력을 하나로 맞추었다. 통일을 선포한 해가 오늘날 이슈발트력 0년의 기점이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낙원의 재현이 아니었다. 통일에는 피가 흘렀고, 왕의 평등한 법 아래에서도 오래된 원한과 특권은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말년에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왜 수도 깊은 곳에 출입을 금한 지하궁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마지막 원정에서 무엇을 보고 돌아오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봉인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태초의 왕이 사라진 뒤 통일왕국은 결국 여러 나라로 갈라졌다. 하지만 그가 닦은 길은 국경이 바뀐 뒤에도 남았고, 그가 세운 법과 연호는 적대하는 왕국들조차 버리지 못했다. 오늘날의 군주들은 서로 다른 왕관을 쓰면서도 모두 그의 폐허 위에 궁전을 세웠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말한다. 이슈발트의 통일은 138년에 끝났지만, 태초의 왕의 시대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VI · 불과 바다가 갈라진 날

    세계를 꿰뚫은 상처

    이슈타리아의 파편과 태초의 화산
    “별은 두 번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균열이 불과 바다에서 서로 다른 얼굴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슈타리아가 무너지던 날, 낙원의 파편은 이슈발트의 하늘과 대지 곳곳에 떨어졌다. 그중 가장 거대한 파편 하나는 북쪽의 얼어붙은 산맥과 중부의 평야가 맞닿은 곳을 꿰뚫고 대지 깊숙이 박혔다.

    땅은 수십 갈래로 갈라졌고, 지하에 흐르던 불과 어비스의 잔재가 한꺼번에 지상으로 솟구쳤다. 산은 그날 이후 수백 년 동안 검은 연기를 토해 냈으며, 후대의 사람들은 그곳을 태초의 화산이라 불렀다.

    그러나 태초의 화산은 단순히 불을 뿜는 산이 아니었다. 정화자들은 산 아래에서 대륙의 다른 어떤 곳보다 깊고 거대한 균열을 발견했다. 그 틈으로 흘러든 혼돈은 용암과 뒤섞여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고, 불길 속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짐승의 울음과 이미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고 한다.

    정화자들은 균열을 완전히 닫지 못했다. 대신 산맥을 깎아 거대한 봉인석을 세우고, 지하의 불길이 한곳에 머물도록 수많은 화맥을 연결했다. 오늘날 태초의 화산이 끊임없이 타오르면서도 대륙 전체를 불태우지 않는 것은, 그 봉인이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대지 아래로 밀려난 혼돈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길을 피해 동쪽으로 흐른 검은 맥은 강과 지하수를 따라 대륙을 가로질렀고, 마침내 오늘날 디트람이라 불리는 땅의 동쪽 바다에 닿았다.

    그날 동해안에서는 파도가 수평선 너머까지 물러났고, 바다 밑에 드러난 거대한 균열 위로 검은 안개가 솟아올랐다. 불을 막은 것만으로는 정화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VII · 왕이 닫은 두 개의 문

    불의 산과 침몰한 도시

    고대 항구도시 아스테라와 바다 아래의 거대한 봉인
    “한 문은 돌과 불로 닫혔고, 다른 문은 이름과 기억으로 닫혔다.”

    태초의 화산 아래에서 시작된 균열이 동해까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낸 이들은 통일왕국보다 오래전에 활동했던 정화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다 밑의 상처를 감시하기 위해 해안에 도시 하나를 세웠다.

    도시의 이름은 기록마다 다르게 남아 있으나, 가장 오래된 석판은 그곳을 아스테라라 부른다. 아스테라는 항구이면서 봉인이었고, 도시이면서 거대한 마법장치였다. 거리와 수로는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었고, 중앙의 등대는 바다를 비추는 대신 태초의 화산을 향해 빛을 보냈다.

    화산의 불길이 강해지면 등대의 빛은 어두워졌고, 바다 밑의 혼돈이 움직이면 산 아래의 봉인석이 울렸다. 도시의 주민들은 이 두 장소를 불의 문물의 문이라 불렀다.

    어느 하나라도 완전히 열리면 다른 하나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스테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만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기억의 일부를 도시의 수정에 기록했다.

    쌓인 기억은 바다 아래의 혼돈이 만들어 내는 거짓 목소리와 환영을 구별하는 방벽이 되었다. 도시를 지키는 것은 돌이나 성벽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름과 기억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정화자들의 시대는 끝났고, 아스테라의 역할을 아는 이들도 줄어들었다. 도시의 수호자들은 외부인이 봉인의 힘을 탐내기 시작하자 항구를 지도에서 지우고, 자신들의 언어와 항로를 감추었다.

    통일왕국이 세워질 무렵에는 아스테라를 실재하는 도시가 아니라 바닷사람들의 전설로 여기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태초의 왕 이슈발트는 즉위하기 전부터 두 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은 통일 이후 태초의 화산과 아스테라를 왕실 직속 봉인지로 선포하고, 종족과 출신을 가리지 않는 수호단을 파견했다. 북부와 중부를 잇는 도로가 화산을 멀리 우회하도록 만들어진 것도, 디트람 동부의 항해 기록 일부가 왕실 명령으로 폐기된 것도 이 시기였다.

    왕의 치세 말년, 불의 문과 물의 문이 동시에 흔들렸다. 화산에서는 처음으로 붉은 눈이 내렸고, 아스테라의 등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륙을 비추었다. 태초의 왕은 가장 신뢰하던 이들만을 이끌고 동해로 마지막 원정을 떠났다.

    그 원정 이후 아스테라는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왕국의 공식 기록은 거대한 해일이 도시를 삼켰다고 적었다. 그러나 디트람의 오래된 뱃노래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스테라의 주민들이 물의 문을 닫기 위해 스스로 도시의 수문을 열었고, 태초의 왕은 마지막까지 중앙 등대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 뒤 왕은 수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스테라는 지도와 기억에서 사라졌고, 태초의 화산에는 왕실의 인장이 새겨진 새로운 봉인석이 세워졌다. 두 장소를 연결하던 기록은 왕이 만든 지하궁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되었으며, 통일왕국이 무너진 뒤에는 그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사라졌다.

    오랜 세월 동안 불의 문과 물의 문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유적으로 여겨졌다. 드워프들은 화산 아래에서 들리는 박동을 대지의 심장이라 불렀고, 디트람의 어부들은 폭풍 속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침몰한 선원들의 울음이라 여겼다.

    하지만 카라드의 오래된 석판과 동해에서 건져 올린 아스테라의 파편에는 지금도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불이 세 번 숨 쉬면 물이 길을 드러내고, 물이 열세 번 울면 잠든 별이 눈을 뜬다.”

    기록자의 주

    륀데와 이슈타리아, 무너진 별의 자손에 관한 이야기는 확정된 역사라기보다 여러 종교의 성전과 종족별 구전, 소실된 석판의 번역을 엮은 신화적 기록이다. 같은 사건도 지역과 신앙에 따라 전혀 다르게 전해지며, 그 모순 자체가 오늘날 이슈발트의 갈등과 믿음을 이루는 중요한 일부다.

    오늘날 이슈발트의 들과 숲, 설원과 항구를 거니는 다섯 종족은 모두 아득한 옛날 멸망한 낙원 이슈타리아에서 쏟아진 무너진 별의 자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혼돈에 잠긴 새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이들은 자연과 맹약했고, 어떤 이들은 대지와 살을 섞었으며, 어떤 이들은 생명의 불꽃을 작은 육신에 응축했다. 또 다른 이들은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 심연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가두었다. 그 선택은 수많은 세대를 지나 피와 뼈, 기억과 문화가 되었고, 마침내 서로 다른 종족의 이름으로 뿌리내렸다.

    인간

    평균수명 약 80세
    번식력 높음

    인간은 무너진 별의 자손이 지녔던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종족으로 여겨진다. 다른 형제들이 살아남기 위해 특정한 힘과 깊이 결속했을 때, 인간의 선조들은 어느 하나의 권능에도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않았다.

    그들은 정령과 속삭이는 귀도, 대지와 맞닿은 강철 같은 육체도, 마나의 미세한 떨림을 읽는 감각도 얻지 못했다. 혼돈을 억누르는 저항력 또한 마족에 미치지 못했다. 대신 어떠한 힘에도 완전히 묶이지 않은 채, 무수한 길로 뻗어갈 가능성을 물려받았다.

    인간은 낯선 땅과 이질적인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인다. 한 사람의 생은 짧지만, 기록과 교육, 제도와 전승을 통해 선대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건넨다. 오래 사는 종족이 한 가지 결정을 두고 수십 해를 헤아리는 동안, 인간은 도시를 세우고 제도를 고치며 때로는 한 세대 안에 왕국 하나를 일으키거나 무너뜨린다.

    그들의 가장 큰 힘은 타고난 육체나 신비한 권능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길 앞에서도 다시 걸음을 내딛는 불요불굴의 정신이다. 장생종들은 인간을 두고 성급하되 역동적이며, 짧게 타오르기에 더욱 눈부신 종족이라 평한다.

    그러나 빠른 세대교체는 오래된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다. 인간의 나라는 변화에 능한 만큼 과거를 쉽게 잊고, 선조가 남긴 잘못을 낯선 비극처럼 되풀이하기도 한다. 무너진 별의 자손에 관한 옛 노래가 왜곡된 데에는, 인간이 지닌 짧고도 격렬한 역사 또한 한몫했으리라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특별한 하나를 얻지 않은 대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모든 가능성을 품었다.

    엘프

    평균수명 약 600세
    번식력 매우 낮음

    엘프는 가늘고 길게 뻗은 귀와 섬세한 감각, 고목의 나이테처럼 깊은 정신을 지닌 장생종이다. 그들의 선조는 혼돈으로 뒤틀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령들과 맹약했고, 그날 이후 자연의 흐름을 자신의 생명과 이어 붙였다.

    엘프는 바람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과 물길이 흐려지는 기척, 나무뿌리 아래로 번지는 병든 기운을 예민하게 느낀다. 숙련된 자는 정령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계약을 맺으며, 메마른 땅을 달래거나 오염된 숲을 긴 세월에 걸쳐 되살린다.

    그들의 신진대사는 느리다. 적은 음식과 수면으로 오랫동안 움직일 수 있지만, 상처와 질병이 회복되는 속도 또한 더디다. 계절과 환경이 급격히 변하면 육신과 마음이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엘프는 하나의 은혜와 한 번의 맹세를 수백 년 동안 간직한다. 오래된 우정은 세대를 건너 이어지고, 잊히지 않은 배신은 후손의 외교문서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인간에게 이미 전설이 된 전쟁도 어떤 엘프에게는 아직 어제의 상처처럼 선명하다.

    긴 수명은 깊은 통찰과 인내를 주었으나, 새로운 계절을 받아들이는 일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래 망설이지만, 한번 뜻을 세우면 수십 년, 때로는 수백 년 동안 굽히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엘프가 하이델 대삼림에 살아가지만 모두가 실바니아의 왕실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숲 곳곳에는 저마다 다른 정령과 옛 법을 섬기는 부족들이 있으며, 검은 숲의 타락이 번진 뒤로 그 오래된 가지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맺은 약속을 지키며, 세상이 잊은 것들을 대신 기억한다.

    하플링

    평균수명 약 200세
    번식력 낮음

    하플링은 인간의 절반가량에 이르는 작은 체구와 옆으로 뭉뚝하게 뻗은 긴 귀를 가진 장생종이다. 옛 노래는 그들의 선조가 거대한 재해 속에서 살아남고자 육신과 생명의 힘을 작고 단단하게 응축했다고 전한다.

    작은 몸 안에는 놀라울 만큼 촘촘한 마나의 길이 뻗어 있다. 하플링은 대기와 사물 속에 흐르는 마력의 미세한 어긋남을 감지하며, 다른 이가 지나치는 주문의 균열이나 마법장치의 불길한 떨림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곤 한다.

    타고난 감응력에 끝없는 호기심이 더해져, 하플링은 마도학과 마공학의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낡은 주문을 더 정교하게 다듬고, 마법과 기계를 맞물리게 하며, 누구도 깨우지 못한 고대 장치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일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전이다.

    단데르탄의 높다란 마탑과 디트람의 분주한 공방, 비스탄의 모험가 길드 어디에서든 하플링 기술자를 만날 수 있다. 위험한 유물을 발견했을 때 물러서기보다 먼저 구조를 들여다보는 성정 탓에, 위대한 발견과 크고 작은 폭발 모두가 그들의 이름 뒤를 따른다.

    예민한 감응력은 축복인 동시에 상처가 된다. 마력이 뒤엉킨 장소나 어비스에 오염된 땅에서는 두통과 환청, 감각의 혼란을 겪기 쉬우며, 마력 폭주에 휘말리면 다른 종족보다 깊은 충격을 입기도 한다.

    하플링은 자녀를 많이 두지 않지만, 태어난 아이 하나를 공동체 전체가 오랜 세월 돌본다. 혈연 못지않게 스승과 제자, 공방과 연구집단의 인연을 중히 여기며, 한 세대가 끝내지 못한 발명과 연구를 다음 세대가 자연스럽게 이어받는다.

    그들은 작은 육신 안에 응축된 생명과, 닫힌 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호기심을 품었다.

    드워프

    평균수명 약 100세
    번식력 보통

    드워프는 키가 매우 작지만 어깨와 흉곽이 넓고, 뼈와 근육의 밀도가 높은 종족이다. 그들의 선조는 갈라지는 대지와 무너지는 산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흙과 바위의 힘을 자신의 살과 뼈에 받아들였다.

    그들의 육체는 체구에 비해 무겁고 강인하다. 높은 열기와 광산의 먼지, 지하의 탁한 공기를 잘 견디며,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만으로도 암석 안쪽의 균열이나 멀리서 다가오는 붕괴를 알아채는 이들이 많다.

    광업과 제련, 건축과 금속세공은 오랫동안 드워프의 이름과 함께 불려왔다. 그러나 모든 드워프가 대장장이이거나 광부인 것은 아니다. 그들의 본질은 직업이 아니라, 가치 있다고 믿은 하나의 길을 끝까지 파고드는 집중력에 있다.

    어떤 이는 칼 한 자루에 수십 년을 바치고, 어떤 씨족은 무너진 요새 하나를 대를 이어 복원한다. 그들의 완고함은 종종 타인에게 고집으로 보이지만, 드워프에게 그것은 자신의 기술과 경험,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한번 상대의 실력과 진심을 인정한 드워프는 종족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깊은 신뢰를 건넨다. 드워프 사회에서 신뢰는 화려한 말이 아니라 함께 흘린 땀과 끝내 지켜낸 약속으로 증명된다.

    그들의 수명은 엘프나 하플링만큼 길지 않으나, 노화는 비교적 늦게 찾아온다. 생애 대부분을 강건한 성인의 몸으로 살아가다가, 말년에 이르러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쇠약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지의 강인함과, 한번 정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무거운 마음을 간직했다.

    마족

    평균수명 약 300세
    번식력 낮음

    마족은 붉거나 푸른 피부와 머리 위로 솟은 뿔을 지닌 장생종이다. 피부빛과 뿔의 모양은 혈통과 출신지에 따라 크게 달라지며, 드물게 잿빛이나 자주빛 피부를 타고나는 이들도 있다.

    가장 오래된 전승 속에서 마족의 선조는 혼돈에 굴복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무너진 별의 자손이 감당할 수 없던 어비스의 잔재를 자신의 육신 속에 가두어, 그것이 대륙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마족의 피에 혼돈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이 혼돈을 억누르는 살아 있는 감옥이라는 것이다.

    머리 위의 뿔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몸 안에 남은 불안정한 힘을 순환시키고 안정시키는 기관으로 여겨지며, 심하게 손상될 경우 고열과 환각, 마력 불균형이 찾아온다. 양쪽 뿔을 모두 잃는 것은 생명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마족은 어비스의 기운과 마물의 오염에 강한 저항을 보인다. 일부는 생명이나 토지에 스며든 혼돈을 자기 몸으로 끌어들여 억누르기도 한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 내부의 봉인이 흔들리고, 육신과 정신 모두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들은 감정을 숨기거나 갈등을 에둘러 말하기보다 정면으로 드러내는 편이다. 논쟁과 대련으로 상대의 의지와 진심을 확인하는 문화가 발달했기에, 바깥에서는 거칠고 호전적인 종족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마족 사회에서 힘은 타인을 짓누를 권리가 아니라, 약한 자를 지켜야 할 의무다. 전통 회의에서는 가장 힘없고 지위 낮은 이가 먼저 입을 열며, 가장 강한 자는 모두의 말을 들은 뒤 마지막에 답한다. 강자의 목소리가 먼저 울리면 약자는 진심을 삼킬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세월이 흐르며 ‘혼돈을 몸에 가두어 세상을 구한 자들’이라는 노래는 ‘혼돈을 받아들인 자들’로, 다시 ‘어머니를 배신하고 심연을 섬긴 자들’이라는 이야기로 변질되었다. 그 왜곡은 추방과 개종 강요, 마침내 잿빛전쟁으로 이어졌다.

    960년의 마족에게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고향이 없다. 어떤 이들은 국경의 작은 공동체에 모여 살고, 어떤 이들은 이름과 뿔을 감춘 채 인간의 도시에 섞여든다. 모험가 길드는 법으로 그들에게 동등한 자격을 허락하지만, 법전 밖의 시선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혼돈의 상처를 짊어졌고, 그 희생의 이름마저 빼앗겼다.

    이 기록은 각 종족에게 흔히 나타나는 경향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 피와 귀의 모양, 수명의 길이가 한 사람의 마음과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 같은 종족 안에서도 태어난 땅과 믿는 신, 속한 가문과 살아온 세월에 따라 서로 다른 수많은 삶이 존재한다.

    왕국은 한순간에 태어나지 않았고, 멸망한 나라 또한 단숨에 사라지지 않았다. 아래의 연대기는 이슈발트력 0년부터 960년까지 대륙에 이름을 남긴 주요 국가와 연맹의 존속을 건국 순서대로 기록한다.

    0년138년

    이슈발트 통일왕국

    대륙 중부 · 수도 이슈라

    태초의 왕이 다섯 종족을 하나의 별 아래 불러 모은 최초의 왕국. 무너진 뒤에도 그 길과 법은 모든 후대 국가의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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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년167년

    북부 소국과 요새도시들

    북부 설원

    통일왕국의 깃발이 사라진 뒤 눈보라 속에 난립한 작은 왕국과 성채들. 살아남은 도시는 차츰 칼덴의 이름 아래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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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년411년

    아르델리아 왕국

    중부 평야 · 수도 아르카디아

    황금 곡창과 옛 도로망 위에 세워져 번영했으나, 왕관을 둘러싼 불길이 마침내 들판까지 삼켜 버린 중부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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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년526년

    칼덴 마법왕국

    북부 설원 · 수도 글라시아르

    마법이 생존을 지키던 시대에 태어나, 끝내 마법이 혈통과 지배를 증명하는 왕관으로 변한 북부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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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년389년

    루메리아 성왕국

    중서부 · 수도 루멘

    가난한 자를 품던 성광이 차츰 완전한 질서의 이름으로 굳어져, 이단과 숲을 불태우는 불꽃이 된 신정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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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4년602년

    마리나 해상동맹

    남부 해안 · 맹주 마리나토스

    같은 적 앞에서만 돛을 나란히 세웠던 항구들의 동맹. 경쟁과 약탈 속에서도 훗날 디트람이 될 바다의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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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2년814년

    카라드 보루연합

    태초의 화산 동부 · 대보루 카라드

    용암과 지하 마물에 맞서 망치와 방패를 함께 든 드워프 보루들의 연합. 깊은 불꽃의 붕괴와 함께 길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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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9년현재

    하이델 숲 맹약

    하이델 대삼림 · 중심지 실바니아

    문스톤필드에서 맺은 공동 방위의 서약. 독립된 숲과 부족들을 이어 주지만, 검은 숲의 그림자가 그 매듭을 시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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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2년현재

    비스탄 공국

    대륙 중부 · 수도 아르카디아

    왕관을 거부한 공작이 세운 황금 들판의 중립국. 모든 길이 모이는 만큼, 모든 나라의 욕망 또한 이곳에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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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7년현재

    단데르탄 제국

    북부 · 수도 글라시아르

    일곱 마법귀족의 왕관 아래 세워진 설원의 제국. 재능은 곧 신분이며, 빛나는 마법의 뒤편에는 차가운 계급이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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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3년현재

    디트람 연합국

    남부 해안 · 중심도시 마리나토스

    아홉 닻의 협약으로 태어난 상인 공화정. 모든 항구는 자유를 노래하지만, 그 노래의 크기는 종종 금화의 무게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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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1년739년

    잿빛 왕관국 바르카르

    동부 황무지 · 수도 바르카르

    돌아갈 땅을 잃은 마족들이 여덟 해 동안 세운 마지막 성벽. 왕관은 재가 되었으나, 그 나라의 진짜 이름은 아직 논쟁 속에 남았다.

    왕관국 기록 펼치기 →

    시대의 얼굴들

    어떤 사람은 여관의 저녁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어떤 사람은 왕국의 마지막 새벽을 선택했다. 같은 형식으로는 담을 수 없는 서로 다른 삶이 시대의 얼굴을 이룬다.

    역사를 바꾼 인물들

    어떤 이름은 판결문에 남았고, 어떤 이름은 맹세와 증언 속에 살아남았다. 서로 다른 선택으로 시대의 흐름을 바꾼 이들의 기록을 모았다.

    아델란 카이르

    아델란 카이르

    인간왕실 기록관다섯 왕관 전쟁

    왕국의 마지막 유언을 읽은 사람. 진실을 세상에 외치는 대신, 언젠가 진실을 감당할 시대를 위해 그것을 땅속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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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마 아쉬혼

    세르마 아쉬혼

    마족첫별 근위대장왕궁 피난

    왕좌를 지키라는 명령을 버리고 궁전의 하인과 아이들을 탈출시킨 근위대장. 어떤 나라에서는 반역자, 다른 나라에서는 마지막 충신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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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시에나 실바니아

    라시에나 실바니아

    엘프맹약의 중재자문스톤필드

    열두 숲이 서로를 믿지 못하던 밤, 누구도 왕이 되지 않는 동맹을 설계한 엘프. 맹약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왕위 계승권부터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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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렌 아스칼

    요렌 아스칼

    인간파문된 성기사전쟁 증언자

    숲을 불태우라는 명령에 복종했던 기사. 뒤늦게 검을 버리고 적진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이 저지른 죄와 왕국의 명령을 함께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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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벤 비스탄

    아르벤 비스탄

    인간초대 비스탄 공작왕관 거부자

    승리한 장군이자 가장 유력한 계승자였으나 왕을 칭하지 않았다. 그의 겸손이 평화를 만들었는지, 계산이 중부를 지켰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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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레나 로웨

    마레나 로웨

    인간곡물창고 서기열쇠의 반역

    칼 한 번 들지 않고 왕국의 군량 체계를 무너뜨린 서기. 왕실의 봉인을 위조해 굶주린 시민에게 창고를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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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산드라 벨로라

    카산드라 벨로라

    인간공동함대 제독아홉 닻의 협약

    서로 명령을 듣지 않던 여덟 함대를 한 줄의 신호기로 움직인 제독. 전쟁이 끝난 뒤에는 자신에게 영구 지휘권을 주려는 제안을 가장 먼저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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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렐 핀치

    도렐 핀치

    하플링계약술사연합 장부 설계자

    포탄보다 먼저 병사들의 급료가 바닥난다는 사실을 알아챈 계약술사. 도시들이 서로를 믿지 않아도 장부만은 믿게 만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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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카

    바르카

    마족잿빛 왕관피난민의 왕

    고향을 잃은 이들에게 성벽과 이름을 주었던 왕. 대륙의 기록은 그를 마왕이라 불렀고,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마지막까지 ‘우리의 문지기’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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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네스 로안

    이네스 로안

    인간길드 치유사금서의 기록자

    적군과 아군보다 먼저 부상자의 이름을 적었던 치유사. 그녀의 금서가 발견된 뒤에야 잿빛전쟁의 민간인들이 역사에 이름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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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과 산의 경계에 선 사람들

    960년의 이슈발트에서도 오래된 숲과 산은 새로운 비밀을 낳는다. 숲의 맹약과 산의 전통이 흔들리는 곳에서, 오래된 우정과 추방자의 원한, 장인들의 책임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험받는다.

    오딜리타 베르녹

    오딜리타

    엘프은퇴한 전설 모험가쌍단검

    백 년 넘게 전장을 떠돌고도 느긋함을 잃지 않은 모험가. 은퇴 뒤에는 모든 부탁을 거절했지만 갈라드리엘의 편지만은 읽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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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드리엘 실바니아

    갈라드리엘

    엘프실바니아 수석 중재자문스톤 샘 수호자

    왕좌 대신 맹약의 동의를 통해 숲을 이끄는 중재자. 온화한 목소리와 물의 정령술로 갈라진 부족들을 한자리에 붙들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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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가나 로웨

    모르가나

    인간그림자교단 간부네크로맨서

    죽은 정령마저 명령에 복종시킬 수 있다고 믿는 젊은 네크로맨서. 검은 숲의 재앙을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자원으로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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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라핀 에르베인

    세라핀

    엘프검은 숲의 추방자타락한 정령술

    검은 숲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이유로 추방된 젊은 정령사. 광적인 확신 아래에는 구하지 못한 이들을 향한 슬픔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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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룬다 카르하임

    브룬다 카르하임

    드워프천년로 감독관카르둠 산성

    꺼진 적 없는 용광로를 맡아 온 완고한 장인. 불이 멎은 날, 자신의 기술이 아니라 산의 심장부터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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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딘 딥벨

    오르딘 딥벨

    드워프지층청자검은 맥박

    발밑의 진동으로 갱도의 균열과 산의 움직임을 듣는 조사관. 모두가 침묵이라 부른 순간, 그는 땅속에서 두 번째 심장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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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로운 시대의 사람들

    대륙력 960년의 일상은 사소한 취향과 고민으로 기록된다. 그것 역시 전쟁 이후 사람들이 되찾은 삶의 일부다.

    리브라 카셀

    리브라

    하플링마법사반토막 동전 여관

    언제나 짖궂은 하플링 마법사. 그녀가 웃으면 여관의 평온은 대개 오래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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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렌 에일로렌

    시렌

    엘프검사반토막 동전 여관

    고요한 눈빛 아래 오래된 세월을 감춘 엘프 검사. 합리주의 속에 감춰진 엉뚱함이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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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네 아르델

    린네

    인간전사반토막 동전 여관

    활기찬 웃음으로 모두를 미소짓게 만드는 인간 전사. 그녀가 있는 자리에는 다툼 뒤에도 웃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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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리안 브램

    델리안

    인간 노비스 방패수 지망생

    화려하게 앞서 나가기보다, 넘어진 동료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곁을 지키는 성실한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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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 아르보렌

    노아

    엘프 노비스 정령궁수 지망생

    불평은 누구보다 먼저 하지만, 뒤처진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언제나 가장 빠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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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 루스티르

    벨 루스티르

    하플링 노비스 보조마법사 지망생

    말을 꺼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동료에게 필요한 주문만큼은 누구보다 먼저 준비해 두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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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에 남은 이야기

    왕관과 전쟁이 역사를 새겨도, 사람들의 삶은 그보다 작고 다정한 순간들 속에서 이어진다.

    왕관과 맹세의 시대

    승자의 연대기와 패자의 구전이 엇갈린다. 봉인된 문서와 지워진 증언, 살아남은 사람들의 선택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얼굴로 남겼다.

    다섯 왕관의 마지막 밤

    다섯 왕관의 마지막 밤

    132년옛 왕도 이슈라정치 · 미스터리 · 붕괴
    “왕은 죽었고 유언장은 다섯 장이다. 그런데 새벽의 종이 울리기 전, 존재하지 않아야 할 여섯 번째 봉투가 발견되었다.”

    통일왕국의 마지막 국왕이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죽자 궁전의 문이 닫힌다. 다섯 권역의 사절은 서로 다른 유언장을 내세우고, 왕실 기록관 아델란은 어느 문서에도 없는 여섯 번째 봉인의 흔적을 발견한다.

    근위대장 세르마는 왕좌보다 궁 안에 갇힌 사람들의 피난을 우선하지만, 새벽이 오기 전에 원본 유언장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봉투 하나의 행방과 그날 밤 열린 문 하나가 통일왕국의 마지막 기록을 갈라놓는다.

    문스톤필드의 열세 번째 맹세

    문스톤필드의 열세 번째 맹세

    389년하이델 동부맹약 · 전쟁 · 증언
    “열두 숲의 대표는 모두 도착했다. 비어 있어야 할 열세 번째 돌만이 먼저 빛나고 있었다.”

    루메리아의 숲 소각 명령이 내려진 밤, 열두 부족과 정령 공동체가 문스톤필드에 모인다. 왕위를 포기한 중재자 라시에나는 숲 전체를 지배할 왕이 아니라, 위기가 닥쳤을 때만 서로를 지키는 맹약을 제안한다.

    파문된 성기사 요렌은 자신이 가담했던 소각 작전의 명령서와 생존자 명단을 내놓는다. 누구의 대표석도 아닌 열세 번째 돌은 아직 목소리를 얻지 못한 존재를 위한 자리로 남고, 그 빈자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하이델의 첫 맹세가 달라진다.

    왕관 없는 새벽

    왕관 없는 새벽

    411~412년아르델리아 말기기근 · 반역 · 건국
    “도시는 굶고 있었다. 그날 밤 왕실 곡물창고의 열쇠 하나가 주인 없이 거리로 흘러나왔다.”

    수확 전쟁으로 아르델리아의 들판이 타고 수도가 굶주리자, 왕실 서기 마레나는 봉인된 곡물창고의 열쇠를 빼돌린다. 창고를 열면 군량 체계가 무너지고, 닫아 두면 날이 밝기 전에 수백 명이 굶어 죽는다.

    장군 아르벤 비스탄은 왕좌와 들판 소각 명령을 함께 거부한다. 곡물의 행방, 무너지는 왕실을 대하는 시민과 병사들의 선택, 왕관을 쓰지 않겠다는 한 장군의 선언이 이듬해 비스탄 공국의 첫 새벽으로 이어진다.

    아홉 번째 닻

    아홉 번째 닻

    603년디트람 남해해전 · 계약 · 연합
    “여덟 함대가 서로의 명령을 거부하는 동안, 어느 깃발도 달지 않은 배 한 척이 봉쇄선을 가로질렀다.”

    검은 돛 해적단이 남해의 곡물 항로를 막자 아홉 도시 가운데 여덟 도시는 함대를 보냈지만, 함대를 잃은 아홉 번째 도시는 깃발 없는 무주선 한 척과 대표자만을 파견했다. 그러나 관세와 지휘권을 둘러싼 다툼 때문에 함대는 출항조차 하지 못하고, 임시 제독 카산드라는 중립선을 이용한 위험한 돌파 작전을 준비한다.

    계약술사 도렐은 도시들이 서로를 믿지 않아도 공동 급료와 손실만큼은 나누게 만드는 장부를 내놓는다. 무주선 한 척의 항로와 아홉 번째 서명이 해적 봉쇄의 승패뿐 아니라 훗날 디트람 연합국의 헌장을 결정한다.

    재가 된 왕관

    재가 된 왕관

    734~739년바르카르전쟁 · 피난 · 기록
    “성벽은 내일 무너진다. 오늘 밤 남길 수 있는 것은 이름뿐이다.”

    잿빛전쟁의 마지막 겨울, 바르카르의 성벽 안에는 피난민과 부상자, 포로와 탈영병이 뒤섞여 있다. 바르카는 군대보다 아이와 기록 보관자를 먼저 피난시키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지만, 서쪽 통로는 이미 적에게 노출되어 있다.

    중립 치유사 이네스는 어느 군대에도 속하지 않은 사망자 명단을 작성한다. 성문을 지킬지 열지, 피난 명단을 숨길지 세상에 내보낼지, 바르카를 해방자로 기억할지 전쟁을 일으킨 군주로 기록할지가 재가 된 왕관의 의미를 바꾼다.

    아직 기록되지 않은 길

    960년의 이슈발트에서도 오래된 숲과 산은 새로운 비밀을 낳는다. 잊힌 맹약과 잠든 심장이 다시 움직이며 현재의 삶을 흔든다.

    은빛 숲에 검은 비가 내리면

    은빛 숲에 검은 비가 내리면

    960년하이델 실바니아타락 · 예언 · 오래된 우정
    “실바니아의 샘은 아직 오지 않은 장례식의 이름을 비추었고, 은퇴한 모험가는 오래 묻어 둔 단검을 다시 들었다.”

    검은 숲의 경계에 하늘로 되돌아가는 비가 내리고, 오래전에 죽은 정령들이 젖은 뿌리 사이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문스톤 샘을 지키는 수석 중재자 갈라드리엘은 실바니아가 무너지는 여러 미래를 보지만, 모든 예언의 끝에는 친우 오딜리타 베르녹이 피 묻은 단검을 들고 서 있다.

    숲 맹약의 권한만으로는 서로 대립하는 부족을 움직일 수 없기에, 갈라드리엘은 백 년 넘게 전장을 누빈 뒤 은퇴한 오딜리타를 다시 부른다. 두 사람이 좇은 타락의 흔적은 검은 숲에서 추방된 젊은 정령사 세라핀과, 죽은 정령을 군세로 묶으려는 그림자교단의 네크로맨서 모르가나에게 이어진다.

    세라핀은 검은 숲이 병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상처 입고 분노한 것이라 주장하고, 모르가나는 그 분노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 힘이라고 속삭인다. 검은 숲을 정화할지, 목소리를 들을지, 혹은 이용하려는 손부터 끊어낼지를 두고 네 사람의 목적과 오래된 우정이 충돌한다.

    용광로가 다시 깨어나기 전에

    용광로가 다시 깨어나기 전에

    959년카르둠 산성밀실 · 재난 · 장인
    “천 년 동안 꺼지지 않던 불이 멎자, 카르둠은 가장 먼저 산문부터 걸어 잠갔다.”

    드워프 산성 카르둠의 천년로가 갑자기 식고 모든 출입구가 봉쇄된다. 감독관 브룬다는 누군가 화맥을 훔쳤다고 의심하지만, 지층청자 오르딘은 용광로 아래에서 산의 것이 아닌 두 번째 맥박을 듣는다.

    사고 당일 들어온 상인과 호위, 씨족의 손님, 폐쇄 공방의 장인들이 한꺼번에 용의자가 된다. 결백을 증명하려는 조사와 봉인된 공방을 노리는 움직임이 뒤엉키는 동안, 검은 광맥은 식은 용광로 아래에서 조금씩 자라난다.

    천년로를 다시 켜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산 아래 잠든 존재에게 새로운 연료를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료가 금속인지 기억인지 생명인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브룬다의 전통과 오르딘의 경고 사이에서 카르둠의 운명이 갈린다.

    평화가 허락한 작은 이야기

    거대한 사건이 지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잔을 부딪치고 검을 배우며 내일을 준비한다. 사소한 만남은 때때로 가장 오래 남는 인연이 된다.

    반토막 동전 여관

    반토막 동전 여관

    943년비스탄 공국 변방일상 · 소동 · 인연
    “하룻밤 손님이 방값을 치르기도 전에 여관 지붕이 먼저 날아갔다.”

    황금 들판 끝의 낡은 여관에는 장난을 멈추지 않는 리브라, 무표정한 듯 모든 일을 챙기는 시렌, 고기와 술 앞에서 계획을 잊는 린네가 살고 있다. 폭발한 마도구와 사라진 숙박비, 정체를 감춘 손님이 평온할 뻔한 하루를 차례로 망쳐 놓는다.

    지붕을 고치는 일은 어느새 수상한 의뢰와 변방의 작은 소동으로 이어진다. 같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의 사정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하룻밤 묵고 떠날 예정이던 인연도 여관의 오래된 장부에 이름을 남긴다.

    교관님, 어서오세요!

    교관님, 어서오세요!

    960년아르카디아 모험가 길드일상 · 성장 · 육성
    “신입 세 명을 맡아 달라고 했지, 세 사람의 인생까지 책임지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모든 길이 모이는 도시 아르카디아. 길드의 작은 행정 착오 끝에 오늘 처음 문을 연 누군가가 세 명의 어린 노비스를 맡게 된다. 잘못을 바로잡기도 전에 세 소년은 이미 훈련장에 나란히 서서 첫 수업을 기다리고 있다.

    특별한 재능은 없지만 누구보다 성실한 방패수 델리안, 입을 열 때마다 가시 돋친 말부터 튀어나오는 엘프 궁수 노아, 뛰어난 마법 실력과 달리 자기소개조차 어려워하는 하플링 벨 루스티르. 검과 주문보다 서로의 속도를 기다리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시끌벅적한 길드 생활이 시작된다.

    별의 궤적

    별이 지고 왕관이 바뀔 때마다, 대륙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남겨진 연도는 그 거대한 발자국의 일부다.

    태초 · 신화 시대

    이슈타리아의 붕괴

    만물의 어머니 륀데가 빚었다고 전해지는 낙원 이슈타리아가 어비스의 침식으로 무너지고, 세계는 수많은 조각으로 파쇄된다.

    태초 · 신화 시대

    무너진 별의 자손과 대륙의 정화

    이슈타리아의 생존자들이 이슈발트의 혼돈을 정화하기 위해 오랜 전쟁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여러 종족이 모습을 갖추게 된다.

    0년

    태초의 왕과 이슈발트력의 시작

    스스로를 이슈발트라 칭한 태초의 왕이 대륙의 통일을 선언한다. 그의 치세는 훗날 이슈발트력 0년의 기점이 된다.

    138년

    다섯 왕관의 마지막 밤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마지막 국왕의 죽음 뒤 다섯 권역이 서로 다른 유언장을 내세운다. 원본 기록은 사라지고, 통일왕국은 다섯 왕관 전쟁 속에서 해체된다.

    389년

    문스톤필드의 열세 번째 맹세

    루메리아의 소각 명령과 한 성기사의 증언을 계기로 열두 숲이 왕 없는 공동 방위 맹약을 체결한다. 오늘날 하이델 숲 맹약의 기원이 된다.

    411~412년

    왕관 없는 새벽

    열쇠의 반역으로 왕실 곡물창고가 열리고, 아르벤 비스탄이 들판 소각 명령과 왕관을 함께 거부한다. 이듬해 중립을 표방한 비스탄 공국이 세워진다.

    527년

    단데르탄 제국 선포

    일곱 마법귀족 가문이 북부를 재편하며 제국을 세운다. 마법 재능은 곧 지위라는 질서가 더욱 굳어진다.

    603년

    아홉 번째 닻

    검은 돛 해적단의 봉쇄 속에서 여덟 함대와 한 권의 공동 장부가 결합한다. 전시 협약은 디트람 연합국의 헌장과 공동 통화의 출발점이 된다.

    731년

    잿빛 왕관국 바르카르 건국

    박해를 피해 모여든 마족 피난민들이 동부 황무지에 자치국가를 세운다.

    734~739년

    재가 된 왕관

    마족의 자치권을 둘러싼 잿빛전쟁이 벌어지고 바르카르가 멸망한다. 길드 치유사 이네스의 금서는 훗날 전쟁의 민간인과 피난민에게 잃어버린 이름을 돌려준다.

    943년

    반토막 동전 여관 개업

    비스탄 공국 변방의 수상쩍지만 매력적인 여관에서 왁자지껄한 일상과 작은 모험이 펼쳐진다.

    960년

    신임 길드 교관 부임

    아르카디아 모험가 길드에 새로운 교관이 부임하고, 세 소년의 미숙한 첫걸음이 시작된다.